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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장 스님 법문

이월 보름 법문 (대행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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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보름법문

사람이 본래 나쁜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게 죄입니다. 모든 건 몰라서 죄를 짓고 그 대가를 받고 인과응보라는 엄청난 결과를 천차만별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여러분들한테 하고 넘어갈 말씀을 오늘은 수박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과거는 현실에 짊어지고 나왔으니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수박 한 덩어리라면 수박 속에 씨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어제 수박 씨를 심었더니 오늘 수박 속에 그 씨가 도로 들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수박 씨가 싹이 되고 싹이 자라서 수박이 열리게 됐고, 수박이 열렸기 때문에 수박 씨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와 싹과 수박이 둘이 아니라 한몸인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 드리는데도 이해를 못하신다면... 나무가 자기 뿌리를 보지 못하듯 인간도 자기의 근본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내기 이전인 과거 씨, 즉 불성을 밖에서 찾으려고 애를 쓰니 그게 어디 찾아집니까. 수박 속의 씨와 같은 것인데, 그러니 절대로 밖에서 지식으로나 학식으로 알려 하지 말고 끄달려서도 안되고, 한 곳으로 들고 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24시간을 좌선한다 참선한다고 앉아 있다 해서 그것이 진정한 좌선이 아니고 참선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사방이 툭 터지고 끝없는 진리가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는 속에서 살고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기고 거기서 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고, 꺼내는 것도 거기요 넣는 것도 거기요 들이는 것도 거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없으면 세상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여러분들이 없다면 여러분 몸 속의 중생들도 없을 것이고, 바로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화두라는 것을 누누히 말씀 드렸습니다. 다만 처음 오신 분들도 계실 것 같아 이렇게 자세히 말씀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문수보살이 유마힐 거사에게 무슨 인연으로 병이 생겼으며 병이 어떻게 나았느냐고 물었지요. 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몸 속에 있는 중생들의 병이 나아야 내 병도 낫는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내 몸으로부터 체험하고 실험해서 지혜가 스스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뜻이 숨어있는 거지요. 말만 듣고 이론으로만 알지 마시고 그 뒷면의 숨은 뜻을 아셔야 됩니다.
또 문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방이 왜 비었으며 어찌 시자가 없습니까?” 이 이야기는 옛날에 한암 스님께 들은 것인데 탄허 스님과 더불어 얘기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물으니까 유마힐 거사는 “모든 부처님 국토도 비어 있으며 외도나 마구니가 다 내시자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비어있는 것도 아니고 비어있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은 어떠한 연고입니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관문이기도 하니까요. 말 잘하는 분들은 말로 하시겠지만 말함이 없이 하시면 됩니다. 귀신방귀와 같으니까요. 종은 쳤는데 소리만 났지 잡을 수 없고 종친 사이도 없고, 종소리는 울려 퍼졌는데 울려 퍼진 사이도 없이 퍼졌듯이 말입니다. 그 뜻을 이렇게 본다면 찰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것이 돌아갈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 비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물과 산이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는 것이지요.

또 외도나 마구니가 전부 내 시자라고 한 것은 안과 밖, 보이는 데나 보이지 않는 데나 다 내 시자요 도반이기 때문입니다. 부처, 중생이 따로 없고 마구니, 외도가 따로 없고····. 언어가 붙지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니라’한 뜻은, 비유하자면, 요리를 해서 접시에 담을 건 접시에 담고, 컵에 담을 건 컵에 담고, 대접에 담을 건 대접에 담아야 만이 각양각색으로 되어 있는 그릇들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차원에 따라 용도에 맞게 사용하기 때문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깊은 뜻을 알아야만 천차만별로 각각 있지만 한 군데로 들고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모습 다르고 내 모습 다르고 네 차원 내 차원 이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은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는 것입니다.

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부처가 아니게요. 만약 부처가 있다면 부처가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방에는 아촉불이라는 이름을 붙여 놨고, 서방정토에는 아미타불로 붙여 놨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 마음이 말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자기 이름 붙여 놓은 것입니다.

앞에서 수박 얘기하면서 씨와 싹과 수박 셋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부처는 생각내기 이전이요, 생각을 냈다 하면 그건 바로 법신, 곧 문수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내어 밖으로 나온 것이 보현이예요. 들이고 내는 것도, 모든 것을 보호하면서 화하는 것도 보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만히 있으면 생각내기 이전이요,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이요, 움직였다 하면 보신이고 화신이예요. 여러분들이 넘어졌다면 아이쿠 하고 자기 손으로 털고 일어나지, 남 손이 털어주고 일으켜 주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보현이지요. 그리고 보신이며 찰나찰나 화하니 화신이지요.

여러분들은 경전을 보시되 글씨가 아닌 백지의 뜻을 알아야 만이 경전을 올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 구절구절의 뜻을 헤아려 실천궁행 해야 만이 부처님의 불종이라 할 수 있고,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누구에게라도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부드러운 말을 해주라는 거지요. 그것이 바로 보살행이니까요.
그런데 문수보살은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빈 것은 어떠한 것을 비었다고 합니까?” 여러분들에게 물었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말을 배우라는 게 아니라 뜻을 아시라는 거지요. 이런 말을 해도 여러분들은 그냥 집어 잡숴야 돼요.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이 말로 옮기지 않아도 됩니다.

유마힐 거사가 대답하기를 “본래 공한 것을 어떻게 공이라고 체험합니까?” 하고 또 물었습니다. 꼬리가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거죠. 공했다고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공한 것을 체험한 것이라는 얘기지요. 그럼 공한 것을 어디에서 구합니까? 부처님 해탈 속에서 구하죠. 그렇지요?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겠는데, “62외도소견 속에서 구합니다”라고 답했어요. “62견은 어디서 구합니까?”라고 다시 물으니, 부처님 해탈 속에서 구한다고 했습니다. 참 묘하게 대답했지요. 지금 이 세상 전체의 한마음 속에서 구한다는 뜻이지요. 거기서 밖에는 구할 수 없지요.
그러니 그러한 뜻을 감지하고 행하면서 지혜를 넓혀가야 할 것이니, 이것을 옛날에는 대나무 귀신 방귀를 먹고 넓혀간다고 했지요. 자기의 싹을 키우려면 대나무 귀신 방귀를 먹여 키우되 적게 먹여서도 안되고 많이 먹여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낚싯밥인지도 모르죠. 이 도리를 아는 분들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62견은 어디서 구하느냐고 물으니, 부처님 해탈 속에서 구한다고 했지요. 다시 “부처님 해탈은 어디서 구합니까?”라고 물으니, 중생들의 마음 속에서 구한다고 했어요. 항상 말씀 드리는 것이지만 여러분들이 아니었던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가 아니었던들 내 어찌 보고 느끼고 체험했겠습니까? 그러니 모두 벗이요 도반이요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활하시면서 온갖 가난과 병고와 우환으로 인해 받는 괴로움이 많이 있죠. 그런데 조금이라도 이 도리를 알고 공부한다면 아주 편안하고 자유스러운 도리, 생산적이고 개발적인 도리를···. 불가사의 하다는 언어도 붙지않는 그대로 편안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요즈음 가만히 보면 자기 정신이 아닌 남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깥에서 유전으로 인해서 그렇기도 하고 안에서 인과로 인해서 영계가 들고 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신경이 예민해지고 급박한 상황일 때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거든요. 살아가다가 회사가 망했다든지, 공부를 하다가 너무 지친다든지, 또는 자기 능력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다든지, 혹은 가정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여간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만이 여러분들 스스로 그 모든 질환을 물리치고 녹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용도에 따라서 오는 대로 거기서 밖에는 해결을 못한다고 맡겨놓고 관하며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묘한 것은 관하며 지켜보는 것이지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면 습이 녹아지고 인과응보가 무너져서 나를 발견하게 되고, 그때 진짜공부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입력입니다. 컴퓨터에 입력하듯, 다가오는 대로 입력을 하면 그대로 돌아가니, 동적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자동기 입니다. 물질을 떠나서 말입니다.

모든 걸 주인공에 맡겨놓다 보면, 둘 아닌 도리를 알게 되므로 그땐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아까, 뭐라 했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자식은 자식이고 부모는 부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병을 고쳐주려면, 더구나 정신질환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건 네 주인공만이 너를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믿고 맡기도록 해야 합니다.

거기에 묘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죽었는데 이렇게 들어와서 그런다고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그 생각을 떠나야 할 텐데, 놓아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게 어디 떨어집니까?
도대체 뭐가 붙었습니까 물 한 그릇에다 물방울 하나 넣은 것과 같은데, 항상 말씀 드려도 그것을 놓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렇게 라도 하겠습니까? (법상에 놓인 두 개의 물컵으로) 그래 다른 영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이렇게 부었습니다. (한 컵의 물을 다른 컵에 부으심) 그럼 이게 그대로 물 한 그릇이지 어디 따로 있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은 체가 없어요. 다른 영계가 내 집 주인 노릇을 하더라도 내가 부족한 것도 부족한 거지만 모두 한 그릇에 담겨 있어요. (물을 마심) 이렇게 먹어 치운다면 좋을 것을 · ···. 영(0)에다 수많은 영을 더한다 해도 그냥 영(0)입니다···. 허허허.

거기에 뭐가 두드러집니까? 뭐가 붙었다고 하겠습니까? 참 이상스럽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들을 하니 몇 년이고 고통을 받고 애를 쓰는 거 아닙니까? 왜 각각 보십니까? 둘이 아닌 도리를 가르치는데 무엇 때문에 둘로 보십니까? 이것은 내가 꼭 말을 하고 넘어가야 겠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하도 고생들을 하니까요.
어느 영이 마음 속에 들어왔다 해도 둘이 아니니, 바로 주인공이예요. 그러니 이 몸을 정상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당신(주인공)밖에 없다고, 뜻으로 그 속의 주인공을 잡아주는 거예요. 아셨습니까? 제사, 천도를 수백 번 지내는 것보다 그 한 생각이 필요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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