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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장 스님 법문

유월 초하루법문(대행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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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이런 생각이 나는군요.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켰는데, 바람이 불자 다 꺼지고 하나만 남아 있더라는
얘기 말입니다.
그것은 가죽 속에다 켠 불은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꺼지지 않는다는 뜻이죠.
우리가 마음의 촛불을 켠다면 천둥 번개가 치고 억수 같은 비바람이 불어도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자리를 해 주신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말로 감사의 표시를 다하리까?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고자 하는 그 열의가 너무나 대단하고 찬란해서
말로는 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물질 문명이 발전해서 안방에서도 텔레비전으로 세계를 다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목이 마를 때 물 한 모금을 보기만 하고 먹지 못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목마를 때에 물 한 모금을 줄 수 있고,
내가 마실 수 있어야 실천이 되며 도인 것입니다.

여러분들한테 말씀 드리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상세계·중세계·하세계가 직결이 되어 있는데, 때에 따라서는 똑같이 고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거, 어떤 사람은 저런 거, 천차만별로
가지각색의 일이 벌어지고 있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칠성이니, 지장보살이니, 관세음보살이니, 주해신이니,
주산신이니 하는 이름으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놓으셨습니다만 일심으로
돌아가니, 주처에 일심으로 돌아간다 이겁니다. 상세계에도 직결이 돼 있고, 중세계에도 직결이 돼 있고, 하세계에도 직결이 돼 있다는 소립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 일심, 미래 일심, 현재 일심, 곧 삼심이 일심이 돼서 점심을 먹었다는 얘기와 똑같은 겁니다.

아픈 것, 고통스러운 것, 즐거운 것, 또 산에서 벌어진 일이나 물에서 벌어진 일이나, 모든 면에서 이름만 무성할 뿐 그 일거수 일투족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한 군데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일에 대해서 입력을 해 놓으면 자동적으로 보살로 나투어 응신이 돼서 대책을 세워 나가죠.
그런데 통신이 안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직 여러분들 마음의 주처에만 통신처가 있습니다. 딴 데는 없어요.
그 통신처에서 통신이 하달이 돼서 전체적으로 분야와 용도에 따라 대책을
세울 수가 있는 거죠. 그뿐이 아닙니다. 상세계에서 만이 아니라 중세계에도 하달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정신계의 일을 모른다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우주의 생산처라든가 또는 블랙홀에서 다스리는 그 모든 생명들, 모든 생산처의 교차로를 차원에 따라서 배출시키는 부서 등 모든 곳이 접근이 되면 제각기 소임을 다하게 됩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가 생활하면서 접근해 보고 둘 아니게 느끼고 알게 되는 반면에 상세계까지도 공법으로서 작용이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생사의 생산처라든가 또는 블랙홀의 차원을 다스려서 차원에 따라서 내려 보낼 건 내려 보내고, 올려 보낼 건 올려 보내고 하는 그 하달처를 우리가 생산처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둘로 본다면 절대로 통신이 될 수가 없고, 통신처에서 서로 둘 아니게 연락을 취할 수 없다면, 만약에 태양이 축소되거나 팽창되거나 해도 어떻게 까딱할 수가 없고, 물로 인해서 사람이 다 죽는다고 해도 까딱할 수가 없고, 지구가 쪼개진다 해도 까딱할 수가 없어요.

우리 마음들이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하면 주처에 놓을 줄 알아야 빛보다 더 빨리 통신이 돼서 그것을 가늠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최상의 원동력을 가졌다는 보배로서, 자부할 수 있는 마음은 바로 여러분들의 주처라고 하는 겁니다.
‘한마음' 다르고 ‘마음' 다릅니다.
몸 안에 들은 모든 생명체와 같이 둘이 아니게 한마음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바깥으로는 우주와 삼세와 더불어 같이, 통신이 되면서 하나로 구성이 되어
돌아갈 수 있는 나툼이 있어야 만이 우리가 대처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어려운 게 아닙니다.

자가 발전소는 바로 여러분들이 제각기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가 발전소하고 직결이 돼 있으니까, 내 전화통으로 자가 발전소에만 전화를 하면 그것이 한 생각이 돼서 바로 거기까지 통신이 되는 거죠.

그냥 생각하는 것 하고, 한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요.
한생각 하는 그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그런 예가 있었죠. 헬리 혜성이 혹성에 부딪히면 어쩌나 하고 애간장이 타던 때가 있었죠?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자발적으로 피해 가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마음이 거기까지 통신이 돼서 헬리 혜성하고 둘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대로 그냥 가는 거죠.

만약에 악이 나한테 덤볐다 할 때 둘로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기를 죽이겠습니까? 죽이지 않으니까 선이 돼 버리죠. 이것이 모두 지혜로서 자유권을 얻는 방식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복잡하게 법계에 얼키고 설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함이 없이 하고 무심으로 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무심으로 살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자기는 더불어 같이 사는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뛰어야 합니다.
생각이 났으면 뛰는데 뛰는 사이 없이 뛰어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발자취 얘기를 가끔 하는데 뛰되, 걸어 왔던 발자취를
생각하지 말라 이 소리입니다. 뛰는 사람이 이미 뛰어 왔던 발자취를
생각합니까? 걸레는 다 빨고 나면 걸레통에다 팍 팽개칩니다.
만약에 그게 금덩어리 같으면 그냥 착이 붙어서 팍 팽개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금덩어리도 헌 걸레 빨아서 내던지듯 하라 이 소립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도둑이 훔쳐갈 수가 없지만, 꽁꽁 뭉쳐서 깊숙이 감춰 놓는다면 더 잘 찾아가죠.
도둑이 생각할 때도 아무데나 금을 팽개쳤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일에 지혜로운 생각을 갖게 되면 여유가 있고 참다운 삶, 생사를 초월하는 삶, 너그럽게 대처할 수 있는 삶이 된다 이겁니다.           
 
불교가 스님들만 공부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늘 말씀 드리듯이 우리 인생은 지금 모습으로는 한 철 사는 겁니다. 이 모습을 가지고 한 철 동안에 살아나가는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다음 생에 차원에 따라 끼리끼리 같은 모습을 가지고 나오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고, 또 그것을 반복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습도 달라지고 소임도 달라집니다. 탤런트가 어떠한 역을 잘했으면 잘한 대로 못했으면 못한 대로 다시 배역을 받아 나오듯이 자기가 한 대로 소임을 받아 가지고 나오니 얼마나 정확하고 묘한 도리입니까?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항상 좋은 마음으로 주인공에 모든 것을 다시 입력하라고 하는 겁니다.
컴퓨터처럼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니 그것이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입력한 대로 다 풀려서 다시 나옵니다.
그러니 항상 인간으로서 그 어떠한 것도 넘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 자리에 입력을 하세요.

마음이라는 이름이 마음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쉴 사이 없이 마음은 찰나찰나 나투면서 돌아갑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마음이 이렇게 했느니 저렇게 했느니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아닌 한마음으로서 그냥 여여하게 초월해서 함이 없이 한다면
그것은 아주 최상의 평등공법이죠.
그래서 마음은 아주 영묘한 겁니다.

예전에 원주에 있을 때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 장가 들이고 시집 보낸다고 사다 놓은 금을 잊어버렸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고양이를 시루에 찌면 고양이가 비틀어지는 대로 도둑질한 사람이 비틀어진다고 해서 도둑을 잡을 욕심으로 고양이를 시루에다 쪘답니다.

그랬더니 그 고양이가 비틀리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찌는 사람을 쳐다 봤는데 그 달부터 그 집 며느리가 어린애를 가져서 낳고 보니 영락 없는 고양이를 낳았거든요. 그러니 사람들에게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고양이한테도 마음은
있습니다.
L.A.에서는 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차를 타고 가다가 고양이를 치었는데 고통을 견디질 못해서 비틀리면서 쳐다 보더니 죽더랍니다. 그런데 그 달부터 어린애를 가져서 낳았는데 고양이를 낳았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우리가 아주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는 ‘우리는 다 늙었으니까 괜찮겠지.' 하지 마시고 다음에 또 나올 때 생각을 해 보세요. 사람은 누구나 부모님의 정자와 난자 그리고 영혼의 삼합이 합쳐져야 형성됩니다.

인연이라는 건 악한 인연도 있고 선한 인연도 있습니다. 선의 인연으로서 자식이 됐다면 아주 평화스럽고 좋지만 악의 인연으로서 자식을 낳았다면 평화스럽지 못하고 끊일 사이 없이 분란이 일어나죠. 그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연이 되었다가 뼈 아프고 가슴 아프게 인연이 된 사람은, 깨 벌레 얘기를 했듯 자식으로 태어나서는 중간에 죽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는 동안에는 아주 잘하다가 그냥 탁 죽어 버리니 그 자식이 가슴에 묻힌단 말입니다. 악연의 원리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여러분들은 그냥 지나가니까 모르시겠지만,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우리는 지금 문제의 근원을 몰라서 어떻게 수습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쌍둥이를 낳았는데 한쪽이 잘 못되어 등이 서로 붙었다든가 하는 문제들 말입니다.

알고 본다면 그게 전부 악연으로 맺어진 문제들입니다. 자식을 귀하다고만 하지 마시고 올바르게 지도를 해 주되, 항상 관하며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한다, 네 뿌리를 의지하고 살아야 유전성이니 인과성이니 하는 모든 것이 다 녹느니라.' 하고 가르쳐 줘야 합니다.

그것은 재입력을 하는 거거든요. 다시 입력을 해 넣으면 앞서의 인과성이나 유전성이 다 무너지니까요. 무너지는 반면에 다시 입력한 게 새로이 나오게 되니까 팔자 운명이 붙을 데가 없다 이 소립니다.

항상 말하듯이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고 하는데 왜 없다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곳으로 걸어왔을 때 그 발자취는 이미 없어졌습니다. 가 버렸으니까 없고, 미래로 걸어갈 거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재에는 그것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이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없다 이 소리입니다. 한생각 입력하는 데서 업보가 오고, 착을 두는 데서 인과가 오고 유전성이 오고 영계성도 오는 겁니다.

타의에서 영계성이 오든, 자의에서 영계성이 일어나든 모든 것이 집착, 욕심으로 오는 겁니다. 누가 사랑을 하지 말라고 했나요, 애정을 두지 말라고 했나요? 사랑을 하고 애정을 갖되, 순간 순간 그렇게 했으면 쥐고 있지 말고 발자취처럼 걸어 왔으면 그냥 내 버려라 이거죠.

제대로 입력이 되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지면서 새로 나오는데, 입력을 했다가도 할까 말까 망설이면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아서 다시 자기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 하긴 하되 과감히 버리고 살며 이미 걸어왔던 발자취를 생각하지 말고 과감히 버리고 살라는 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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