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윤5월 초하루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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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윤5월 초하루법문
초하루 보름에는 이 절에 법회를 잘 안다니시는 분들이 많이들 오십니다.
이 절의 법회라고 하는 것은 신행회를 얘기합니다.
우리들은 자기가 있는데 한 찰나도 떠나지 않는 대자대비한 자기 스승
진짜 자기 근본이라고 하는 부처가 계십니다.
근데 왜 이 절에 와야 되나. 저는 그것을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절에 다닌 사람입니다.
집에서도 할 일이 있고 밖에서도 할 일이 있고, 할 일들이 많고 바쁜데
그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 다 부처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하면 왜 따로
절에 가야 되나?
그것을 한 번 살펴주시면 좋겠습니다.
절에 와서 항상 내가 내 근본과 더불어서 진실한 믿음을 갖고 살면
그대로 마음의 불을 켠 것이라고 하는데, 절에서 촛불도 켜고 향도 켭니다.
더군다나 법당에 오시면 좌복을 펴시는데 그냥 생각없이 당연하다 생각하면
문제가 안되는데
그 하나하나의 이치를 따지다 보면 이게 걸리지 않는게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좌복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길래 절에서 그렇게 좌복을 하는가?
어느날 법회 끝나고 일어나는데 정신없이 휴지조각처럼 좌복이 쭉 널려있어요.
옛날에 속가 때도 좌복 정리를 하면서 도대체 이 좌복이 왜 이렇게 절에
오면 바닥도 여름이면 나뭇바닥이고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을 텐데...
단순히 앉아서 법문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한 방석인가?
그러면 방석 색깔은 왜 회색이나 연꽃 색이나 가사 색깔을 쓸까?
도대체 이런 것들은 어떤 의미로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데 어우러지는 걸까?
그렇게 하면서 제가 스스로 마음에서 절에 좌복이라는 것은 이러한 뜻이구나
라는 것을 불사할 때 느꼈습니다.
우리 스님네들은 좌복 위에서 앉아서 죽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고 할
정도로 절에서 이 좌복은 의미가 있습니다.
간혹 뜻을 헤아리지 않고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얘기를 드리는 겁니다.
최소한도 여러분들이 그렇게 마음을 써서 이 자리에 오셨기 때문에
절에서 방석에 앉으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자기가 어떠한 마음을 구할려고 여기 왔는가? 항상 참구 하십시오.
절에 보이는 음식은 여러분들이 빈 그릇 가지고 가서 많이 맛있게 드실려고들 하시는데
이 보이지 않는 자기 천차만별의 인연따라 주시는 부처님의 공양을 받는 자기의 마음이 좌복입니다.
그런데 누가 대신 그것을 해줍니까.
자기가 스스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최소한 내가 이 부처의 자리를 법당은 상징적으로 해놓았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러면 거기에 내가 한 찰나도 떠나지 않는 자기의 근본을 살피시면서
지금 이 시절에 그 제불의 마음 받드는 자기 모든 인연들이 자기 하고 더불어서 있습니다.
받을려고 자기는 왔지만 자식, 친구, 친척들은 안왔습니다.
그런 것까지를 다 헤아리셔서
자기 있는데 그 모든 인연들이 함께 하고 조상님들도 같이 하고
그 모든 것이 부처와 둘 아닌 것으로 지금 이렇게 한다고 하면서
좌복을 마련하고 앉으시고 그것을 받는 것으로 절하시고
그러면 그것 자체가 굉장히 자기 마음 자세를 바르게 해서
이 자기 마음 자세를 바르고 순일하게 해야 한 찰나도 떠나지 않는
자기 근본, 부처의 마음을 그래도 그림자라도 느껴집니다.
수없는 나날을 절에 분주하게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못해서 모르는 것은 모르고
“아 이절은 영험이 없어, 스님들은 뭐가 부족해”
이러면서 자기의 잣대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합니다.
옛날에 만공선사가 그 시대를 풍미한 일엽스님이 정진한다고 수덕사에
계실 때에 '부처님 젖통만 건드리지' 하고 아주 막말을 하셨죠.
젖은 주무르지를 못하고 있다고.
젖을 주무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젖을 먹냐고.
그러면서 그래도 비구 스님인데 비구니를 보고서 젖통을 갖고 비유를 하니까
얼마나 낮뜨거운 일입니까.
절에서는 보이는 것으로 얘기하는 게 없습니다. 특히 큰스님들은.
여러분들이 보이는 것만 보고 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자기 인연이라든지
그래서 그것도 해결 못하는 겁니다.
항상 부처의 마음을 최소한도 법당에 오셔서 헤아리신다면 이 법당이 그래서
일주문에 들어서는 순간 그 하나하나가 다 여러분들이 하실 수 있어야지
한방울도 안남기고 다 받고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이 커지는 겁니다.
누가 주는 것 아닙니다.
늘 스님께서도 얘기하시고 그러지만 아무도 대신 깨우쳐주고 대신 살아주고
대신 아파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만큼 하셔야 되는 겁니다.
이 초 하나 켜는 것도 얼마나 큰 의미가 있고, 향 하나 피우는 것도 얼마나
큰 뜻이 있는지 모릅니다.좌복 하나에도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참구할 때 그 뜻이 옵니다.
그래서 대의심이 있어야 되고, 그 대의심이 있어야 대정진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그것도 실천하는 믿음이 있어야 끊임없이 돌고 그렇습니다.
60년만에 한 번 오는 윤 5월 첫 번째 맞이하는, 어떻게 보면 다 한 번 밖에 없는 날이지만 더 소중하게 귀하게 생각하시고 그 귀한 시간 헛되지 않게 법당 안에서 만이라도 마음을 써 주시면 아마 스스로 많이들 금으로 가져가실 겁니다.
초하루 보름에는 이 절에 법회를 잘 안다니시는 분들이 많이들 오십니다.
이 절의 법회라고 하는 것은 신행회를 얘기합니다.
우리들은 자기가 있는데 한 찰나도 떠나지 않는 대자대비한 자기 스승
진짜 자기 근본이라고 하는 부처가 계십니다.
근데 왜 이 절에 와야 되나. 저는 그것을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절에 다닌 사람입니다.
집에서도 할 일이 있고 밖에서도 할 일이 있고, 할 일들이 많고 바쁜데
그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 다 부처의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하면 왜 따로
절에 가야 되나?
그것을 한 번 살펴주시면 좋겠습니다.
절에 와서 항상 내가 내 근본과 더불어서 진실한 믿음을 갖고 살면
그대로 마음의 불을 켠 것이라고 하는데, 절에서 촛불도 켜고 향도 켭니다.
더군다나 법당에 오시면 좌복을 펴시는데 그냥 생각없이 당연하다 생각하면
문제가 안되는데
그 하나하나의 이치를 따지다 보면 이게 걸리지 않는게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좌복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길래 절에서 그렇게 좌복을 하는가?
어느날 법회 끝나고 일어나는데 정신없이 휴지조각처럼 좌복이 쭉 널려있어요.
옛날에 속가 때도 좌복 정리를 하면서 도대체 이 좌복이 왜 이렇게 절에
오면 바닥도 여름이면 나뭇바닥이고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을 텐데...
단순히 앉아서 법문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한 방석인가?
그러면 방석 색깔은 왜 회색이나 연꽃 색이나 가사 색깔을 쓸까?
도대체 이런 것들은 어떤 의미로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데 어우러지는 걸까?
그렇게 하면서 제가 스스로 마음에서 절에 좌복이라는 것은 이러한 뜻이구나
라는 것을 불사할 때 느꼈습니다.
우리 스님네들은 좌복 위에서 앉아서 죽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고 할
정도로 절에서 이 좌복은 의미가 있습니다.
간혹 뜻을 헤아리지 않고 계시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얘기를 드리는 겁니다.
최소한도 여러분들이 그렇게 마음을 써서 이 자리에 오셨기 때문에
절에서 방석에 앉으실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자기가 어떠한 마음을 구할려고 여기 왔는가? 항상 참구 하십시오.
절에 보이는 음식은 여러분들이 빈 그릇 가지고 가서 많이 맛있게 드실려고들 하시는데
이 보이지 않는 자기 천차만별의 인연따라 주시는 부처님의 공양을 받는 자기의 마음이 좌복입니다.
그런데 누가 대신 그것을 해줍니까.
자기가 스스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최소한 내가 이 부처의 자리를 법당은 상징적으로 해놓았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러면 거기에 내가 한 찰나도 떠나지 않는 자기의 근본을 살피시면서
지금 이 시절에 그 제불의 마음 받드는 자기 모든 인연들이 자기 하고 더불어서 있습니다.
받을려고 자기는 왔지만 자식, 친구, 친척들은 안왔습니다.
그런 것까지를 다 헤아리셔서
자기 있는데 그 모든 인연들이 함께 하고 조상님들도 같이 하고
그 모든 것이 부처와 둘 아닌 것으로 지금 이렇게 한다고 하면서
좌복을 마련하고 앉으시고 그것을 받는 것으로 절하시고
그러면 그것 자체가 굉장히 자기 마음 자세를 바르게 해서
이 자기 마음 자세를 바르고 순일하게 해야 한 찰나도 떠나지 않는
자기 근본, 부처의 마음을 그래도 그림자라도 느껴집니다.
수없는 나날을 절에 분주하게 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못해서 모르는 것은 모르고
“아 이절은 영험이 없어, 스님들은 뭐가 부족해”
이러면서 자기의 잣대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합니다.
옛날에 만공선사가 그 시대를 풍미한 일엽스님이 정진한다고 수덕사에
계실 때에 '부처님 젖통만 건드리지' 하고 아주 막말을 하셨죠.
젖은 주무르지를 못하고 있다고.
젖을 주무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젖을 먹냐고.
그러면서 그래도 비구 스님인데 비구니를 보고서 젖통을 갖고 비유를 하니까
얼마나 낮뜨거운 일입니까.
절에서는 보이는 것으로 얘기하는 게 없습니다. 특히 큰스님들은.
여러분들이 보이는 것만 보고 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자기 인연이라든지
그래서 그것도 해결 못하는 겁니다.
항상 부처의 마음을 최소한도 법당에 오셔서 헤아리신다면 이 법당이 그래서
일주문에 들어서는 순간 그 하나하나가 다 여러분들이 하실 수 있어야지
한방울도 안남기고 다 받고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마음이 커지는 겁니다.
누가 주는 것 아닙니다.
늘 스님께서도 얘기하시고 그러지만 아무도 대신 깨우쳐주고 대신 살아주고
대신 아파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만큼 하셔야 되는 겁니다.
이 초 하나 켜는 것도 얼마나 큰 의미가 있고, 향 하나 피우는 것도 얼마나
큰 뜻이 있는지 모릅니다.좌복 하나에도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참구할 때 그 뜻이 옵니다.
그래서 대의심이 있어야 되고, 그 대의심이 있어야 대정진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그것도 실천하는 믿음이 있어야 끊임없이 돌고 그렇습니다.
60년만에 한 번 오는 윤 5월 첫 번째 맞이하는, 어떻게 보면 다 한 번 밖에 없는 날이지만 더 소중하게 귀하게 생각하시고 그 귀한 시간 헛되지 않게 법당 안에서 만이라도 마음을 써 주시면 아마 스스로 많이들 금으로 가져가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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