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보름 법문 (대행큰스님)
본문
여러분들 모두가 새해를 맞이해서 올해는 한층 더 분발하여 자유스런 계기를 얻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세상 만물이 모두 내 스승 아님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느끼겠지만 물가에 가서 흐르는 맑은 물을 볼 때 싱그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지요. 그런데 물은 우리들에게 말없이 물과 같이 살라 하고, 꽃을 보면 꽃도 나같이 살라 하며, 모진 땅의 풀 뿌리를 보았을 때도 나를 보고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체 만물이 다 자기와 같이 살라고 하니,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여러모로 지극하게 믿어야 해요. 믿는 것도 밖으로 끄달리며 믿지 말고 안으로 믿으며 놓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일체 만법이 다 그 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니 다시 그 속에 맡겨 놓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야만이 진실하게 구하는 법(法)도 나오고, 깨닫는 도리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명심해서 들으세요. 어떤 분들은 주인공을 찾다가도 때에 따라 어떠한 경계에 부딪히면, 안으로 놓기 이전에 밖으로 끄달립니다. 뿌리에 물을 주어야 줄기와 잎이 잘 자라듯이, 부딪히는 일체 경계도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안으로 놓아야 하는데, 말로는 주인공에 놓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과, 믿음과, 구함이 진실해야만 일체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고, 모든 것을 둘로 보지 않으며 내 탓으로 돌리고, 참 나에서 만이 바른 이끌어줌이 나옴을 알고,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 속에서 하는 것임을 굳게 믿어야 알게 됩니다.
나를 깨닫는 것도 주인공에서 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진실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모두 허상이고 거짓입니다.
곧 죽어도 옳은 것은 안으로 놓고 믿고 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한철 나왔다가 부딪힘이 없다면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한철 날 때 부지런히 노력해서 깨달아야만 다음 생(生)에……. 나고 들고 하기 이전에, 생하고 멸하고 하기 이전에 자유스럽게 오고 갈 수 있으며, 내가 직접 주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인이며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면 스스로 법신이 되고, 화신이 되는 것이죠. 천백억 화신도 될 수 있구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 주인공을 찾는데 집에서 혼자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절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 중에 잘못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교수이면서 자기 가정의 자녀들은 왜 학교에 보내며, 자기가 의사이면서 자기집 아이의 수술을 왜 다른 의사한테 맡깁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상태 때문입니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하면 괜찮건만, 내 자식이라는 착(着)에 의해서 수술을 못하는 것이지요.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며, 조건 없이 남을 이익 되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지요.
그럼 이쯤하고 공부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 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저는 청년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청년 회원입니다.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네 가지를 간추려서 부족함을 무릅쓰고 여쭙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다음 생에 새로이 몸을 얻는 윤회의 과정에서 새로 태어날 영혼들은, 업식으로 인하여 육신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도리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 생각하면 그 업식이 무슨 까닭으로 소, 돼지 또는 인간의 몸을 구별하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스님: 여러분들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가져다 주고 빼앗아 가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가 이 세상 다 살고 갈 때에는 재물은 대문 안에서만 고하고 바깥으로는 인사 한마디 없으며, 자식 부부 또 친구들은 동구 밖에서만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가 살았던 대로 업식만 따라가게 되는 것이죠. 독하게 살았으면 독사가 될 것이요, 남이 먹고 살거나 말거나 사기 쳐서 돼지같이 살았으면 돼지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철칙이 있기 때문에 털끝만큼도 에누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아는 것, 우주 법계에서도 다 알고 있으며 직결돼 있기 때문에 세상과도 가설이 되어 있다고 항상 말했죠. 그러니 만큼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동에 따라 업식이 자기의 본성을 가리므로 눈을 뜨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그 업식으로 말미암아 돼지가 접하는지, 새들이 접하는지, 고양이가 접하는지, 사람이 접하는지 도대체 분간을 못해요. 그래서 돼지 소굴에 들어가면 돼지가 될 것이고, 사람 속에 들어 갔으면 사람이 될 것이니 자기가 한대로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은대로 과보가 주어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받게 마련입니다.
상점에 놓여 있는 모든 물건들을 보십시오. 배는 배대로, 사과는 사과대로 놓여 있지 않습니까? 일체 만물이 다 그러합니다. 금은 금방으로 갈 것이고 넝마는 넝마대로 모일 것입니다. 그건 누가 모여라 모이지 말라 하기 이전에 차원에 따라 그렇게 모이게끔 되어 있죠. 그러니 만큼 자동적으로 업식이 그림자처럼 쫓아 다니면서 그렇게 만들어 놓는 거예요.
그건 다른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죠. 부잣집에 태어나는 것도 자기 업이요,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것도 자기 업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지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공부하는 스님들에게는 선업도 놓고 악업도 놓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업을 지을 때는 악업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면을 다 놓으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 어찌 누구를 탓하리요, 자기 마음 먹기에 달렸는데. 마음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질문자1: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평소에 자신을 되돌아 보면, 마음이란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생멸하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이며, 불생불멸하는 한마음과는 어떻게 다른지요.
스님: 쉽게 말해서 생멸과 불생불멸이 다르다고 할 때,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사람이 없어질 리 없습니다. 나무를 베어 없앴다고 해도 나무 그 자체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을 뿐,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생각할 때 생멸이지만, 포괄적으로 볼 때는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부서지고 변하고 하면서도 이 진리는 끝이 없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깨달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그 언어에도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1: 세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 자신도 삼보에 귀의하기로 마음 먹은 지 오래입니다만 아직도 캄캄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초발심의 경지를 어찌 바른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지요?
스님: 3천년 전이나 3천년 후나, 오늘인 것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붙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히 믿고 놓는 작업을 할 때, 그리고 구하고 물러서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자기가 아닌 자기를 만나는 소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한생각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한 것과 같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과 말이 진실하지 못하고 밖으로 끄달리기 때문에 초발심에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죠. 10년이 지났든, 20년이 지났든, 하루가 지났든, 1초가 지났든 간에 둘이 아니기 때문에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한 찰나이니까요.
그러기에 우리가 말과 행과 뜻과 더불어 진실하게 물러서지 않고 믿고 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10년이 갔다 해도 깨달음에 의해서는 1초와 맞먹습니다. 그러니 초발심이죠.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기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행과 말과 뜻이 함께 결부되어야 하는 것이죠. 컵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에도 재료가 한가지라도 빠지면 안돼죠.
여러 가지의 재료가 결부되기 때문에 컵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지수화풍이 한 데 합해져서 컵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수화풍을 알지 못한다면, 흙과 물을 개어서 바람에 말리고 불에 굽는 과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렇게 인연에 따라 결부되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컵 하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컵 하나도 그냥 무심하게 볼 게 아니라, 우주의 개공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컵으로 나와서 만이 아니라, 그 컵에 물을 담아서 먹어야 비로소 컵이라는 빛이 나는 것이죠.
담아 먹을 수 없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안에 우주개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1: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모든 걸 놓아가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간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자신이 어느새 편안한 경계를 구하고, 그 상태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고 놓는 마음 가운데 편안한 경계를 좋아하는 마음이 깃 든다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스님: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내 마음이 편안하면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도 편안해지기 때문이죠. 모두 한데 뭉쳐서 주인공에 놓을 수 있고 물러서지 않는 진실된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바로 한마음으로 돌아가니 편안함이 오고 끄달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 우주 전체는 하나로 평등하게 돌아가지만 용도에 따라서 달리 쓰게 됩니다. 그러니 둘도 보지 말고 주인공에 모두 일임해서 놓았을 때, 그리고 때에 따라 다가오는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맡겨 놓고 거기서 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고,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겁내지 말고 죽고 사는 것에도 착(着)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자유자재권을 얻어서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얘기했던 바와 같이, 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놓고 진실하게 행하며 부드럽게 뜻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마음 자세가 된다면, 깨달음의 소식도 얻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반면 편안함도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냥 모르겠다,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는 마음으로 놓는 것과, 진심으로 믿고 놓았을 때의 편안함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가 내 스승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그렇게 감응이 된다면 내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게 되는데, 그랬을 때 한마음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묘용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대로 거기에 믿고 맡겨야지 믿지 않고, 또 믿는다 해도 설 믿는다면 공부는 엄청나게 늦어지게 됩니다.
잘되는 것과 잘 되지 않는 것을 다 놓아야 해요. 잘 될 때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잘 안될 때는 안된다고 언짢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입니다. 만약에 회사를 경영하려고 한다면 지위를 높여줄 사람은 높여주고, 낮은 지위가 맞는 사람은 낮춰야 회사가 잘 돌아갈 거 아닙니까. 그런 작업을 제대로 못한 데서야 어떻게 회사를 제대로 경영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법에도 악과 선을 다 놓고 배워야 합니다.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 하나 할까요. 어느 신도가 승진을 시켜달라고 정성을 지극하게 드렸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하게 정성을 드렸는데 그만 승진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그 자리로 승진이 되어서 월남에 가게 되었는데, 월남에 가서 그만 전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난 뒤에 그 신도가 승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 신도는 지극히 정성을 드렸는데 승진이 되지 않았으니 믿음이 산산조각이 났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거기에도 뜻이 있겠지 하고 한생각 돌려 믿고 놓아야지요.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인의 대권을 얻었다면 불리하게 내려놓을 수도 있고, 이익이 된다면 올려놓을 수도 있어야 하고, 해롭거나 이익이 되거나 간에 올려놓기만 한다면 그건 망하고 마는 겁니다. 전쟁에 나가서 싸울 때도 후퇴할 때는 후퇴하고 전진할 때는 전진해야 되듯이, 그런 능수능란한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지휘를 맡아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겁니다. 부처님께서 자유자재한다는 뜻은 중생들의 아픔을 똑같이 느끼면서 이익되게 이끌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부정적이고 남용하는 사람은 자기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봐야 그 때 비로소 아는 것이죠. 그러니 내려놓을 줄도 알고 올려놓을 줄도 알아야 자유자재의 대권을 가졌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이 모두 내 스승 아님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느끼겠지만 물가에 가서 흐르는 맑은 물을 볼 때 싱그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지요. 그런데 물은 우리들에게 말없이 물과 같이 살라 하고, 꽃을 보면 꽃도 나같이 살라 하며, 모진 땅의 풀 뿌리를 보았을 때도 나를 보고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체 만물이 다 자기와 같이 살라고 하니,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여러모로 지극하게 믿어야 해요. 믿는 것도 밖으로 끄달리며 믿지 말고 안으로 믿으며 놓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일체 만법이 다 그 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니 다시 그 속에 맡겨 놓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야만이 진실하게 구하는 법(法)도 나오고, 깨닫는 도리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명심해서 들으세요. 어떤 분들은 주인공을 찾다가도 때에 따라 어떠한 경계에 부딪히면, 안으로 놓기 이전에 밖으로 끄달립니다. 뿌리에 물을 주어야 줄기와 잎이 잘 자라듯이, 부딪히는 일체 경계도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안으로 놓아야 하는데, 말로는 주인공에 놓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과, 믿음과, 구함이 진실해야만 일체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고, 모든 것을 둘로 보지 않으며 내 탓으로 돌리고, 참 나에서 만이 바른 이끌어줌이 나옴을 알고,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 속에서 하는 것임을 굳게 믿어야 알게 됩니다.
나를 깨닫는 것도 주인공에서 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진실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모두 허상이고 거짓입니다.
곧 죽어도 옳은 것은 안으로 놓고 믿고 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한철 나왔다가 부딪힘이 없다면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한철 날 때 부지런히 노력해서 깨달아야만 다음 생(生)에……. 나고 들고 하기 이전에, 생하고 멸하고 하기 이전에 자유스럽게 오고 갈 수 있으며, 내가 직접 주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인이며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면 스스로 법신이 되고, 화신이 되는 것이죠. 천백억 화신도 될 수 있구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 주인공을 찾는데 집에서 혼자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절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 중에 잘못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교수이면서 자기 가정의 자녀들은 왜 학교에 보내며, 자기가 의사이면서 자기집 아이의 수술을 왜 다른 의사한테 맡깁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상태 때문입니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하면 괜찮건만, 내 자식이라는 착(着)에 의해서 수술을 못하는 것이지요.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며, 조건 없이 남을 이익 되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지요.
그럼 이쯤하고 공부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 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저는 청년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청년 회원입니다.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네 가지를 간추려서 부족함을 무릅쓰고 여쭙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다음 생에 새로이 몸을 얻는 윤회의 과정에서 새로 태어날 영혼들은, 업식으로 인하여 육신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도리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 생각하면 그 업식이 무슨 까닭으로 소, 돼지 또는 인간의 몸을 구별하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스님: 여러분들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가져다 주고 빼앗아 가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가 이 세상 다 살고 갈 때에는 재물은 대문 안에서만 고하고 바깥으로는 인사 한마디 없으며, 자식 부부 또 친구들은 동구 밖에서만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가 살았던 대로 업식만 따라가게 되는 것이죠. 독하게 살았으면 독사가 될 것이요, 남이 먹고 살거나 말거나 사기 쳐서 돼지같이 살았으면 돼지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철칙이 있기 때문에 털끝만큼도 에누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아는 것, 우주 법계에서도 다 알고 있으며 직결돼 있기 때문에 세상과도 가설이 되어 있다고 항상 말했죠. 그러니 만큼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동에 따라 업식이 자기의 본성을 가리므로 눈을 뜨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그 업식으로 말미암아 돼지가 접하는지, 새들이 접하는지, 고양이가 접하는지, 사람이 접하는지 도대체 분간을 못해요. 그래서 돼지 소굴에 들어가면 돼지가 될 것이고, 사람 속에 들어 갔으면 사람이 될 것이니 자기가 한대로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은대로 과보가 주어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받게 마련입니다.
상점에 놓여 있는 모든 물건들을 보십시오. 배는 배대로, 사과는 사과대로 놓여 있지 않습니까? 일체 만물이 다 그러합니다. 금은 금방으로 갈 것이고 넝마는 넝마대로 모일 것입니다. 그건 누가 모여라 모이지 말라 하기 이전에 차원에 따라 그렇게 모이게끔 되어 있죠. 그러니 만큼 자동적으로 업식이 그림자처럼 쫓아 다니면서 그렇게 만들어 놓는 거예요.
그건 다른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죠. 부잣집에 태어나는 것도 자기 업이요,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것도 자기 업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지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공부하는 스님들에게는 선업도 놓고 악업도 놓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업을 지을 때는 악업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면을 다 놓으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 어찌 누구를 탓하리요, 자기 마음 먹기에 달렸는데. 마음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질문자1: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평소에 자신을 되돌아 보면, 마음이란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생멸하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이며, 불생불멸하는 한마음과는 어떻게 다른지요.
스님: 쉽게 말해서 생멸과 불생불멸이 다르다고 할 때,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사람이 없어질 리 없습니다. 나무를 베어 없앴다고 해도 나무 그 자체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을 뿐,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생각할 때 생멸이지만, 포괄적으로 볼 때는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부서지고 변하고 하면서도 이 진리는 끝이 없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깨달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그 언어에도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1: 세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 자신도 삼보에 귀의하기로 마음 먹은 지 오래입니다만 아직도 캄캄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초발심의 경지를 어찌 바른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지요?
스님: 3천년 전이나 3천년 후나, 오늘인 것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붙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히 믿고 놓는 작업을 할 때, 그리고 구하고 물러서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자기가 아닌 자기를 만나는 소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한생각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한 것과 같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과 말이 진실하지 못하고 밖으로 끄달리기 때문에 초발심에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죠. 10년이 지났든, 20년이 지났든, 하루가 지났든, 1초가 지났든 간에 둘이 아니기 때문에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한 찰나이니까요.
그러기에 우리가 말과 행과 뜻과 더불어 진실하게 물러서지 않고 믿고 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10년이 갔다 해도 깨달음에 의해서는 1초와 맞먹습니다. 그러니 초발심이죠.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기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행과 말과 뜻이 함께 결부되어야 하는 것이죠. 컵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에도 재료가 한가지라도 빠지면 안돼죠.
여러 가지의 재료가 결부되기 때문에 컵이라는 이름으로 생산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지수화풍이 한 데 합해져서 컵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수화풍을 알지 못한다면, 흙과 물을 개어서 바람에 말리고 불에 굽는 과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렇게 인연에 따라 결부되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컵 하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컵 하나도 그냥 무심하게 볼 게 아니라, 우주의 개공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컵으로 나와서 만이 아니라, 그 컵에 물을 담아서 먹어야 비로소 컵이라는 빛이 나는 것이죠.
담아 먹을 수 없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안에 우주개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1: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모든 걸 놓아가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간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자신이 어느새 편안한 경계를 구하고, 그 상태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고 놓는 마음 가운데 편안한 경계를 좋아하는 마음이 깃 든다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스님: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내 마음이 편안하면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도 편안해지기 때문이죠. 모두 한데 뭉쳐서 주인공에 놓을 수 있고 물러서지 않는 진실된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바로 한마음으로 돌아가니 편안함이 오고 끄달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 우주 전체는 하나로 평등하게 돌아가지만 용도에 따라서 달리 쓰게 됩니다. 그러니 둘도 보지 말고 주인공에 모두 일임해서 놓았을 때, 그리고 때에 따라 다가오는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맡겨 놓고 거기서 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고,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겁내지 말고 죽고 사는 것에도 착(着)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자유자재권을 얻어서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얘기했던 바와 같이, 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놓고 진실하게 행하며 부드럽게 뜻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마음 자세가 된다면, 깨달음의 소식도 얻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반면 편안함도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냥 모르겠다,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는 마음으로 놓는 것과, 진심으로 믿고 놓았을 때의 편안함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가 내 스승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그렇게 감응이 된다면 내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게 되는데, 그랬을 때 한마음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묘용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대로 거기에 믿고 맡겨야지 믿지 않고, 또 믿는다 해도 설 믿는다면 공부는 엄청나게 늦어지게 됩니다.
잘되는 것과 잘 되지 않는 것을 다 놓아야 해요. 잘 될 때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잘 안될 때는 안된다고 언짢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입니다. 만약에 회사를 경영하려고 한다면 지위를 높여줄 사람은 높여주고, 낮은 지위가 맞는 사람은 낮춰야 회사가 잘 돌아갈 거 아닙니까. 그런 작업을 제대로 못한 데서야 어떻게 회사를 제대로 경영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법에도 악과 선을 다 놓고 배워야 합니다.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 하나 할까요. 어느 신도가 승진을 시켜달라고 정성을 지극하게 드렸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하게 정성을 드렸는데 그만 승진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그 자리로 승진이 되어서 월남에 가게 되었는데, 월남에 가서 그만 전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난 뒤에 그 신도가 승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 신도는 지극히 정성을 드렸는데 승진이 되지 않았으니 믿음이 산산조각이 났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거기에도 뜻이 있겠지 하고 한생각 돌려 믿고 놓아야지요.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인의 대권을 얻었다면 불리하게 내려놓을 수도 있고, 이익이 된다면 올려놓을 수도 있어야 하고, 해롭거나 이익이 되거나 간에 올려놓기만 한다면 그건 망하고 마는 겁니다. 전쟁에 나가서 싸울 때도 후퇴할 때는 후퇴하고 전진할 때는 전진해야 되듯이, 그런 능수능란한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지휘를 맡아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겁니다. 부처님께서 자유자재한다는 뜻은 중생들의 아픔을 똑같이 느끼면서 이익되게 이끌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부정적이고 남용하는 사람은 자기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봐야 그 때 비로소 아는 것이죠. 그러니 내려놓을 줄도 알고 올려놓을 줄도 알아야 자유자재의 대권을 가졌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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